5월 20일, 유현진은 SNS에 이혼 합의서가 첨부된 게시글 하나를 올렸다.“싱글, 만남 추구. PS: 생리적으로 건강한 사람 우선”그녀의 이 게시글은 예전에 그녀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주 강씨 가문에 시집갔던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SNS를 뜨겁게 달구었다.헤어지고 난 후, 전 남편이 남성 불임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게시글을 올리다니.정말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걸까?강한서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언론사를 고소하여 그들이 파산할 지경에 이르게 만든 독한 남자다. 그런 그가 아무런 재산도 갖지 않고 이혼한 전처가 자신을 이런 식으로 얘기하도록 내버려 둘 리가 있을까?하지만 20분이 흐른 후, 누리꾼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다. 유현진의 게시글 아래, 새롭게 가입한 계정으로 ‘누군가’가 댓글을 달았다. “날 블랙리스트에서 내보내 줘.”
View More한성우가 움찔 몸을 굳히더니 순간 눈을 부릅뜨고 차미주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차미주가 그의 신호를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한성우의 그곳을 한참이나 쳐다보던 차미주가 갑자기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한성우가 소파에서 벌떡, 튀어 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그는 손이 묶인 채로 침실을 향해 뛰어갔다. 그러나 손이 속박되어 있던 탓에 행동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빠른 걸음으로 달려온 차미주에게 다시 잡혔고 또다시 그녀에 의해 바닥에 쓰러졌다. 한성우는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그는 수도 없이 이런 장면을 상상해 왔었다. 그러나 장담컨대, 자기가 묶여있는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차미주는 한성우의 몸 위에 올라타 몽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성우가 묶인 채로 움직이지도, 도망치지도 못하고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기를 쳐다보고 있자 그가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차미주는 순간 배드신의 소재로 쓸만한 포인트를 캐치했다. “긴장하지 마.”차미주가 한성우를 달래며 말했다. “그저 보기만 할 거야. 구경 다 하면 풀어줄게.”‘내가 묶여 있는 데 대체 뭘 어떻게 구경한다는 거야.’그리고 차미주는 곧 행동으로 묶여서도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한쪽에 세워두었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한성우의 바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차미주의 행동에 한성우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것인지, 한성우는 순간적으로 자기를 묶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냈다. 그는 휙 몸을 돌려 차미주를 아래에 눕혔다. 그는 한 손으로 차미주의 두 손을 머리 위에 잡아두고 다른 한 손으로 벨트를 빼내더니 고개를 들어 씩 미소 지었다. “자기야, 이건 자기가 함부로 가지고 장난할 물건이 아니야.”벨트를 푸는 한성우의 모습은 차미주의 혼을 쏙 빼놓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한성우에 의해 꽁꽁 묶인 뒤였다. 잔뜩 지친 한성우는 땀이 온몸을 적셨다. 그는 셔츠를 벗더
한성우는 차미주의 손을 자기 어깨 위에 걸치고는 입꼬리를 씨익 올려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나 있잖아. 예술을 위해 이 한 몸 헌신하는 것쯤이야 영광이지. 난 한 푼도 받지 않을게.”한 푼도 받지 않겠다는 말에 차미주가 눈을 순간 반짝였다. 그녀는 한성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 언제 갈 거야?”한성우는 차미주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말하며 허리를 숙이던 그는 차미주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 올렸다. 차미주도 얼른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새삼 확인했다. “정말 돈 안 받아?”“정말 무료야.”한성우는 코끝으로 살며시 차미주의 코끝을 비비며 말했다. “키스만 하게 해주면.”차미주의 얼굴이 더 붉게 물들었다. 부끄러운 탓인지, 술 때문인지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러면 키스를 여러 번 하면 더 많이 볼 수 있어?”“당연하지.”마음이 너그러운 모델은 웃으며 차미주의 귓가에 속삭였다. “밤새 봐도 돼.”그 말에 차미주가 한성우보다 더 조바심을 냈다. “그럼 얼른 집에 가자.”한성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명 받들겠습니다.”한성우는 단지 거짓말로 차미주를 달래 집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성우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차미주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얼른 보여달라며 소란을 피웠다. 한성우가 신을 벗겨줄 때부터 차미주는 떼를 썼다. “거짓말쟁이, 무료로 보게 해준다며?”한성우는 차미주의 양말을 벗기며 말했다. “볼 땐 보더라도 네가 맑은 정신일 때 봐야지.”차미주가 한성우를 째려보았다. “나 지금 정신 말짱해.”한성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내가 누군지는 알아?”“개자식!”툭 나온 대답에 한성우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턱 막혔다. “이름이 뭐냐고.”차미주가 입을 삐죽이며 내키지 않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한성우.”“그럼 너 우리 헤어진 건 기억해?”흐리멍덩한 눈으로 한성우를 쳐다보던 차미주가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 “기억
한성우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만약 내가 제작한다면 대박 난다고 해도 미주는 자기 실력으로 성공한 거라고 믿지 않을 거야. 내가 뒤에서 뭔가 수작을 부린 거라고 생각하겠지. 보기엔 호탕해 보여도 자기 일엔 늘 자신감이 부족해.”윤 작가가 말했다. “연애를 무슨 딸 기르듯이 하네.”“어쩔 수 없지, 뭐.”한성우가 우쭐거리며 말했다. “너도 미주처럼 착하고 순진한 애를 만나면 아껴주고 싶을 수밖에 없을 거야.”윤 작가는 피식 웃더니 휴대폰을 꺼내 한성우에게 전화번호 하나를 건넸다. “이건 내 후배 전화번호야. 나중에 미주 씨 시나리오를 그쪽으로 보내. 요즘 웹 드라마를 촬영 중이더라고. 요구도 높지 않은 편이니까, 먼저 도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한성우는 윤 작가가 준 전화번호를 저장하며 물었다. “미리 얘기 좀 잘 해줘. 저작권료가 너무 싸면 안 되니까.”윤 작가가 웃으며 욕을 지껄였다. “돈에 미친 놈아.”식사가 끝난 뒤 한성우는 앙증맞은 차미주의 가방을 메고 그녀를 부축하며 집으로 향했다. “여친 님, 집에 가야죠.”차미주가 비틀거리며 대답했다. “오빠는? 나 아직 물어볼 게 있는데.”‘술 좀 마시더니 오빠?’오빠라는 두 글자 한성우의 질투심에 작은 불씨를 지폈다. “갔어. 뭘 물어보려고?”“나 그거... 그거 물어보려고...”차미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음... 뭘 물어보려 했더라...”차미주가 손을 들어 머리를 탁 치더니 이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생각났어. 배드신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물어봐야 해.”한성우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순간 경계심을 높였다. “그건 물어서 뭐 하게?”“어떻게 써야 하는 건지 가르쳐달라고 할 거야.”“그것도 배워야 아는 거야?”한성우가 자기도 모르게 목청을 높였다. 주변 사람의 이목이 쏠리자 그는 곧 목소리를 낮추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너 방금까지 에로신을 넣은 예술 영화를 디스했잖아. 왜, 너도 쓰려고?”차미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도 쓰
한성우는 고개를 돌려 윤 작가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어린애가 멋도 모르고 하는 헛소리하는 거니까, 마음에 두지 마.”차미주가 괜히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살까 걱정되어 자기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윤 작가가 웃으며 말했다. “네 여자친구 꽤 재밌네.”한성우가 차미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한 눈빛을 지었다. “힘도 세. 혼자서 우리 셋을 때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야.”“...”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차미주가 재촉했다. “윤 작가님, 꼭 그렇게 야한 장면이 있어야 해요? 배드신이 없으면 상 못 받는 거에요?”그건 윤 작가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어떤 스토리엔 스킨쉽을 통해 감정 변화를 표현하는 것도 필요하니까요.”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던 차미주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배드신을 보면서 감정의 변화에 집중해요. 다들 여자 주인공의 가슴이나 남자 주인공의 엉덩이나 쳐다보는 거 아니예요?”“풉—”윤 작가가 입에 머금었던 물을 뿜어냈다. 한성우는 할 말을 잃었다. ‘술을 마시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차미주는 여전히 주절거렸다. “제가 보기엔 그 사람들은 그걸 미끼로 사람들을 낚고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영화를 무엇 때문에 보는지, 정말 모르는 거예요? 포르노를 찍고 싶으면 찍으면 되잖아요. 왜 예술영화라고 포장하는 거죠? 전 이젠 예술영화라는 말만 들어도— 읍—”한성우가 차미주의 입을 틀어막았다. “자기야, 물 좀 마시고 음식도 좀 먹어.”차미주가 한성우의 손을 찰싹 때렸다. “나 배 안— 읍— 고파— 읍—”웃음이 터진 윤 작가가 손을 내저었다. “오늘은 우리끼리인데 뭐, 놔줘. 마음껏 얘기하게.”한성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술을 따지 말았어야 했어.”윤 작가가 말했다. “그래도 꽤 귀엽네. 네가 미주 씨 데리고 왔을 땐 배우를 소개해 주려는 건 줄 알았는데, 작가일 줄이야.”말하며 멈칫한 윤 작가가 차미주에게 물었다. “미주 씨는 무슨 작품 쓰셨어요?”차미주는
송가람이 이렇게까지 얘기하니 한현진도 대충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녀는 송가람의 드레스룸을 슥 훑어보고는 에메랄드 컬러의 개량 한복을 송가람에게 건넸다. “이거로 입어요. 너무 정중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캐주얼하지도 않을 것 같아요.”송가람이 옷을 건네받았다. “역시 안목이 좋으시네요. 이건 오빠가 작년 제 생일 때 선물로 준 거예요. 제가 이 디자이너님의 옷을 좋아하는 걸 알고 몰래 제 사이즈를 기록해 두었다가 주문한 거거든요. 아까워서 선물 받고 몇 번 입어보지도 못했어요.”한현진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녀는 송가람과 송민준 혹은 송병천 사이에 있었던 일은 그다지 듣고 싶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그녀를 잘못 안아가지 않았다면 그들에게는 20여 년이라는 감정의 공백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송병천은 한현진의 어릴 적 사진을 볼 때마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귀여운 어린 시절의 그녀를 안아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며 아쉬워했다. 한현진은 그가 어린 딸이 예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모든 성장 과정을 지나쳐 버린 것을 안타까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쉬운 감정은 한현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이미 인생의 절반을 지나 나이가 드셨고 그의 곁을 지킬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한현진은 가족을 갈라놓은 범인이 죽도록 미웠다. 그러니 송가람이 송민준과 송병천의 옛일을 꺼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현진에게 송가람이 송병천과 송민준에게서 뭘 얼마나 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안타깝게 여기는 건 송가람에게 빼앗긴, 함께 하지 못한 가족들과의 추억이었다. 더 이상 송가람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던 한현진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다른 일 없으면 전 이만 가 볼게요.”송가람이 옷을 내려놓았다. “현진 씨. 전 늘 한서 오빠가 아니었다면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멈칫, 한현진이 걸음을 멈추었다. “강한
송가람은 기분이 퍽 좋은 듯 한현진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뜨뜻미지근한 태도로 인사를 받고 아래층으로 향하려는 한현진을 송가람이 불러세웠다. “현진 씨.”한현진이 고개를 돌렸다. 송가람이 미소 짓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현진 씨, 옷 좀 골라줘요.”한현진은 어리둥절해졌다. 송가람이 말했다. “현진 씨 안목이 좋잖아요. 옷도 잘 입고. 내일 제가 뭐 입고 나가면 좋을지 봐줘요.”한현진은 송가람이 또 무슨 꿍꿍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굳이 거절하지는 않았다. 송병천과 서해금은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으니 한현진은 괜히 송가람과 완전히 사이가 틀어져 송병천을 난감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한현진은 송가람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송가람은 한현진을 자기 드레스룸으로 안내했다. 그녀의 전 드레스룸은 별장에서 제일 큰 방이었다. 당시엔 한현진이 송병천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집에 들어오기 전이라 송가람은 집안의 모든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먹고 입는 것을 포함한 전부를 송가람에게는 최고로 대접했다. 예를 들면 별장에서 볕이 제일 잘 들고 베란다가 제일 큰 방은 송가람 것이었다. 집에서 제일 큰 드레스룸도 송가람 것이었고 환경이 제일 좋은 서재도 송가람의 몫이었다. 한현진이 집으로 돌아온 후, 사실 송병천은 송가람에게 드레스룸을 비우라고 하고 싶었다. 그 드레스룸은 한현진의 방과 제일 가까웠기에 그녀에게 주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이었다. 송가람에게는 드레스룸이 하나 더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옷을 놓기에도 충분한 공간이었다. 물론 송병천은 좋은 마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남자는 많은 부분을 두루 살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그렇게 하면 편리하겠다고만 생각했겠지만 송가람 역시 같은 생각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친딸을 집으로 데려오고 나서 양딸에게 주었던 물건을 줄인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면 그들이 송병천에게 뭐라고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송병천이 그 제의를 꺼냈을 때,
“싸우시죠.”민경하가 말했다. “하지만 대표님께서는 사모님을 이기지 못하셨어요. 결국엔 선물을 사 들고 사모님을 달래셔야 했고요.”강한서는 또 말이 없어졌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또 참지 못하고 민경하에게 질문했다. “혹시 무슨 수단을 써서 저에게 결혼을 강요한 거 아니에요?”“그건 아니에요. 회장님께 찾아가 사모님이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한 건 대표님이셨어요. 당시 사모님께서는 대학을 막 졸업하고 예전의 양아버지에게 정략결혼을 강요당하고 계셨고요. 결혼으로 이득을 본 건 오히려 대표님이라고 할 수 있죠. 아무래도 사모님께서는 대표님보다 많이 어리시잖아요. 보통의 연애를 하셨다면 아마 대표님 나이대의 분은 만날 일이 없으셨겠죠.”“고작 다섯 살이 많을 뿐인데, 제 나이대라뇨.”강한서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자 민경하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이건 사모님께서 하신 말씀이에요. 제가 한 말이 아니라.”그 말에 강한서는 더욱 불퉁해졌다. “내가 전에 얼마나 잘해줬는데, 나이가 많다고 싫어하는 거야.”“사모님은 그저 객관적인 사실을 진술하신 것뿐이지 대표님께서 나이가 많다는 얘기는 아니었어요. 다만 사모님 나이엔 대표님은 확실히 조금—”“됐어요. 닥쳐요.”강한서의 굳은 얼굴엔 우울함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민경하는 핸들을 돌리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강한서가 점차 건강을 회복함에 따라 그의 이성과 감정들도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막 돌아왔을 때의 그는 한현진에 대해 알아가는 것조차 거부했었다. 이상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강한서는 한현진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요즘은 점차 나아지는 것 같았다. 돌아온 뒤로 익숙한 사람과 일들을 많이 접촉했던 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모든 일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신호등을 기다리던 민경하는 줄곧 창밖을 보고 있는 강한서의 모습을 발견했다. 강한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창밖엔 유아용품을 판매하는 가게가 있었다. “대표님, 들어가서 보시겠어요?”강한서가 시
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대표님, 회사로 가실 건가요?”강한서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니요. 먼저 한현진 씨를 댁으로 모시죠.”말을 마친 강한서가 잠시 멈칫하더니 말을 이었다. “아름드리 쪽에 연락해서 청소 좀 해두라고 해요. 내일부터 우리 아름드리로 돌아갈 거예요.”‘우리?’‘임신하더니 이젠 따라다닐 필요도 없는 거야?’민경하는 한현진을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름드리로 돌아가서 살 거라는 강한서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민경하는 한현진의 본가를 향해 운전했다. 본가에 도착하자 물건을 챙겨 차에서 내리려던 한현진은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내일 직접 데리러 와요. 만약 안 오면 저...”강한서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울고불고 난리 칠 거예요?”한현진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매력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강한서의 말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임산부는 원래 감정 기복이 오르락내리락하거든요. 이해해 줘요.”말하며 한현진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강한서는 한현진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민경하에게 물었다. “한현진 씨는 전에도 저랬나요?”민경하가 헛기침하더니 대답했다. “지금은 많이 참으신 거예요. 전엔 대표님께서 사모님을 화나게 하시면 안에서 문을 잠그고 대표님이 못 들어가게 하셨어요. 그래도 지금은 체벌은 안 하시잖아요.”“...”강한서는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제가 예전엔 그 정도로 자기 멋대로 하게 내버려뒀다는 건가요?”민경하가 속삭이듯 말했다. “남자라면 열에 아홉은 여자를 밝혀요. 사모님 외모를 좀 보세요. 그리고 대표님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대표님이라면 아쉽지 않을지.”“...”강한서는 오늘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떠올랐던 엉뚱한 기억 때문에 순간 조금 마음이 불편해졌다. “전 외모에 그다지 관심 없어요.”민경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최고의 미모를 가지신 분과 결혼하셨으니 당연히 외모엔 관심이
“당연히 내가 제작사로서 네 소원을 이뤄줄 수 있지. 하지만.”한성우가 뜸을 들이더니 차미주를 쳐다보았다. “넌 그래도 괜찮아? 그냥 자금을 많이 투자해서 작품 인기를 끌어올리는 거라도 괜찮겠어?”“당연히 안 괜찮지.”차미주가 입을 삐죽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마 엄마에게 엄청나게 비웃음당할 거야.”당시 엄마에게 저작권료를 제일 많이 벌어들이는 작가가 되겠다고 호언장담을 늘어놓았는데 만약 돈으로 그 성과를 거두게 된다면 부정행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차미주는 그런 거짓뿐인 성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실력으로 시상대에 올라 영광을 누리고 싶었다. 한성우가 피식 웃더니 차미주의 목을 감싸 안았다. “내가 널 몰라? 내가 돈으로 네 저작권을 샀다면 넌 아마 바로 나와 헤어지려고 했을 거야.”“이미 헤어졌거든?”차미주는 있는 힘껏 한성우의 손등을 쳐냈다. “계속 이렇게 나 누르지 마. 너 때문에 키가 작아지는 거야.”“그래?”한성우는 차미주의 귓가에 다가가 그녀의 귓불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 넣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아직 팔 하나밖에 안 올렸는데, 몸 전체로 눌러버리면 더 작아지는 거야?”순진한 차미주가 한성우의 말속에 숨겨진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쳤다. “어디 아픈 거야, 아니면 죽기라도 했어. 몸으로 날 누르겠다고? 내가 아무리 힘이 좋아도 널 어떻게 업고 병원에 가?”한성우가 멈칫하더니 피식 소리 내 웃었다. 그는 일렁이는 눈동자로 차미주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누가 너더러 업으래?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일 수는 없는 거야?”‘얼굴을 마주 봐?’‘그럼 어떻게...’흠칫 몸을 떤 차미주는 그제야 한성우의 말을 이해했다. 순간 그녀의 몸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한성우는 마음이 간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계속 음란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등을 돌리는 것도 괜찮아. 하지만 업을 필요는 없어. 그러면 너무 무겁잖아. 넌 그냥 엎드려... 읍—”한성우가 아직 말을 끝내기도 전에 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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